에스큐브디자인랩 대표
얼마 전 프로젝트 최종 발표회에 참석한 기관의 대표가 “뭐 하는 회사입니까?”라는 당황스러운 질문을 했다. “UX(사용자 경험) 리서치 기반의 디자인 회사입니다” 했더니 “디자인 회사에서 나올 결과물이 아닌데…” 한다. “저희는 디자인 전략을 합니다”라고 답변했다. 결론은 결과가 좋다는 것이었으나 도대체 디자인 답지 않은 디자인을 하고 있는 우리는 무엇일까, 생각했다. 또 한 기관의 담당자는 우리 회사 이름에서 디자인을 빼는 것이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한다. 프로젝트 승인 과정에서 왜 디자인 회사가 전략 기획 과제를 진행하느냐는 질문을 계속 받는다고 한다. 설명하느라 상당히 번거롭다는 것이다.
두 가지 사례 모두 디자인을 ‘스타일링’으로 보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디자인을 형태나 미적 요소로만 보는 편견은 내가 디자이너로 일하는 지난 30년 동안 계속 겪어 온 일이지만, 이곳 부산에서는 유독 더 강한 편이다.
일단 디자인을 3가지 레벨로 이해해 보자. 첫 번째 레벨은, 교양으로서의 디자인이다. 자신의 집을 장식하거나 가구의 위치를 변경하거나, 어떤 옷을 입을지 선택할 때 요구되어진다. 디자인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인식이 높은 나라는 디자인 수준이 높을 수밖에 없다. 이탈리아, 일본, 영국 등이 그러하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캘리그래피의 아름다움을 알고, 서체 디자인을 이해했기에 컴퓨터 폰트의 아름다움에 의문을 가질 수 있었고, 이러한 디자인 이해는 디자인 혁신을 가져왔다. 스티브 잡스는 디자이너가 아니다.
두 번째 레벨은 디자인 교육을 받은 전문 디자이너의 레벨이다. 실무 디자이너들은 주어진 문제, 즉 많은 제약의 상황 가운데서 적절한 해결책을 만들어 내는 방법을 알고 있다. 많은 경우 상사나, 조직이나, 클라이언트에 의해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집중한다. 디자인 교육이 이러한 스페셜리스트로서의 디자인 기술을 가르치는 데에 집중되어 있다.
디자인을 미적 요소로만 보는 건 편견
사용자 경험 창의적 해결 능력 필요
경계 허물고 혁신 협력자로 성장해야
세 번째 레벨은 다학제적, 융합적 디자인 싱킹이다. 디자인 싱킹은 단순히 물건의 외형을 디자인할 뿐만 아니라 소위 말해서 ‘사악한 문제’라고 알려진 어렵고 복잡한 시스템과 서비스 문제들을 다룬다. 다양한 전공의 사람들과 협력하며, 비즈니스의 기획 단계부터 참여하며 사용자 중심의 프로세스와 디자이너의 도구로 창의적이고 협력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레벨이다
많은 경우, 디자인을 첫 번째, 두 번째 레벨로만 이해하고, 더 좁게는 미학적인 해결책을 내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삼성에서 최초로 디자인 부사장이 된 정국현 부사장은 “디자이너이기를 거부하라”는 말을 많이 했다. 디자인 인식이 부족했던 90년대, 2000년대, 이 말은 전통적인 디자인의 역할에서 벗어나라는 것이고 주도적으로 여러 부서와 협업하며 혁신을 이루라는 말이었다. 점점 확대되고 융합되어 가는 산업 안에서 디자이너도 비즈니스 프로세스에서 폭넓은 역량을 확보해야 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디자인 싱킹 역량을 가진 디자이너들이 길러졌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선도하며 시장에서 성공하는 혁신적인 과제들이 진행되었다.
기존의 디자인이 전술의 단계에 있었다면 디자인 싱킹은 전략이다. 좋은 디자인은 그냥 ‘디자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비즈니스에서의 실행력과 뛰어난 기술력을 바탕으로 훌륭한 성과를 달성해 낼 수 있을 때 비로소 훌륭한 디자인이 탄생한다. 디자인, 기술, 비즈니스 전략의 효과적인 결합으로 혁신적인 디자인이 나온다.
이런 역량을 갖춘 디자이너가 점점 많이 등장하고 있다. 디자인 결과물을 잘 전달하고 설득할 뿐 아니라, 비즈니스 감각과 리서치와 분석 능력을 갖춘 디자이너 출신 창업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에어비앤비, 핀트레스트, 배달의 민족의 창업자가 디자이너 출신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별히 ‘고객 경험’이 중요한 테크 창업 분야에서 디자인의 중요성은 더 높아지고 있다.
디자인은 계속 진화되고 있다. 융복합과 디지털의 시대, 디자인은 무엇일까? 디자인 업무는 점점 세분화되고 파편화되어 가지만, 점점 더 종합적이고 융합적이고 전략적인 디자이너의 역량이 요구되고 있다. 디자이너들은 전통적인 영역에 머물지 않고 더욱 적극적으로 경계를 허물고 혁신의 협력자로 성장해야 할 것이다.
이 땅의 모든, 디자이너이기를 거부하는 디자이너, 전략적인 디자인으로 디자인의 경계를 허무는 디자이너, 다양한 분야와 융합하며 창의적으로 협력하는 디자이너들에게 응원을 보내며 2023년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한다. 그리고 부산에서 디자인의 인식 확산을 위해서라도 회사 이름에 디자인이라는 이름은 유지할 생각이다.
출처: 부산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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